-숨 막히는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이슬람 세속 건축의 최고 걸작
(SPAIN'S MOORISH PALACE)
그라나다는 다문화 사회의 성공적인 예로 꼽힌다. 이슬람교도들, 기독교도들, 유대인들이 그라나다라는 작은 왕국에서 250년 동안 평화롭게 함께 살았다. 그러나 결국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가 다스리던 1492년에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무어인을 축출하고 신앙의 자유를 금지했다.
알람브라 궁전은 잃어버린 꿈의 기억인 듯 눈 덮인 시에라네바다 산맥 앞에 솟아 있다. 알람브라는 이슬람 세속 건축으로는 타 지마할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꽃들의 향기. 대리석의 차가움, 분수와 작은 수로의 물소리 등이 모두 방문자를 옛 스페인의 동방으로
안달루시아에서 꽃피운 무어 문화의 풍부한 유산이다.
칼라트 알람브라, 곧 '붉은 성'은 그 동쪽 끝에서 정상까지 3500미터 높이로 솟은 산맥의 한 언덕에 올라앉아 있다. 서쪽에는 산맥기슭에 그라나다가 있다. 알람브라의 외관은 많은 부분이 언덕을 에워싼 요새 성벽으로 이루어졌다. 무어 시대 궁전은 이성 벽 안에 있다. 아래에서 맨 처음 보이는 것은 알람브라에서 가장 오래된 부분인 알카 사바인데, 마치 선박의 뱃머리처럼 도시 위로 돌출해 있다.
나스르 왕조의 거처
나스르 왕조의 거처인 알람브라는 서양에서 유일한 무어인 궁전이다. 방벽과 탑들이 개별 건물들과 일련의 누각과 안뜰들을 에워싸고 있는 형국이다. 다양한 각도로 흩어지는 빛들이 이들 공간 구석구석까지 침투한다. 건물 외부의 식물들은 회반죽 몰딩 장식 들에 의해 내부로 이어진다. 이로써 자연과 인공 구조물의 통일이 이루어진다. 내부 복도에서 내다보면, 바깥 풍경이 마치 장식이 풍부한 창틀 액자 속의 그림처럼 보인다. 반대로 밖에서 보면 이 건축물이 분수들, 꽃 피운 재스민, 삼나무들의 배경 구실을 한다.
정원은 무어인들에게 늘 특별한 공간이었다. 정원은 헌신의 대가로 코란이 약속하는 고요하고 평온한 즐거움을 생각나게 한다. 아마 바로 이 때문에 기독교인 정복자들은 정원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바꾸어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알람브라 위쪽 높직한 곳에는 헤네랄리페가 있다. 이는 스페인에서 가장 흥미롭고 쾌적한 정원들을 거느린 건물이다.
외부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은 무어의 전통에 어긋난다. 허식을 통해 부를 과시하는 일은 내부의 사적인 공간에서만 할 수 있다. 이리하여 외부의 수수한 단순함이 내부의 숨 막히는 화려함과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궁전 내부 바닥과 겉보기에는 가벼워 보이는 원주들은 대리석이지만, 천장은 소란과 목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궁전은 세 구역으로 나뉜다. 맥수아르 궁은 원래 행정과 사법 업무를 보던 곳이고, 웅장하고 화려한 연못이 있어 주변 원주들이 비치는 '도금양 안뜰'은 공식 알현 장소로 즐겨 이용되었다. 중앙의 코마레스 탑 안에는 '대사의 홀'이 있는데, 그곳의 바닥까지 창이 난 방에는 술탄이 왕좌에 앉아 있었다. '사자의 안뜰과 주위 건물들은 술탄과 가족, 후궁들이 사생활을 즐기기 위한 공간이었다. 그 중앙에는 사자 12마리가 무어인 건축의 핵심으로 보이는 글귀가 새겨진 흰색 대리석 분수반을 받치고 있다. 글귀는 이렇다.
"그대의 눈으로 하여금 흐르는 정온한물과 대리석을 사귀게 하라. 우리는 그 중 어느 것이 그대를 이끄는지 알지 못한다."
이 동양적인 장려함 한가운데에 고원과 놀라운 조화를 이루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요합스부르크가의 군주를 카를 5세의 궁전이 있다. 길이가 63미터인 육중한 석조 형태들은 아랍 건물들의 섬세한 부분들과 강한 대비를 이룬다. 1526년 미켈란젤로의 제자 페드로 마추카가 성기 르네상스 건축의 전형으로 꼽히는 이 건물을 설계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의 작품은 끝내 완성되지 못했고, 카를 5세는 거기서 살아 보지 못했다.
-서기 79년에 얼어붙어 화산암 아래 보존된 도시
(POMPEII EMERGES from ITS ENTOMBMENT)
나폴리 만을 덮친 커다란 재해는 79년 8월 24일에 시작되었다. 천둥소리 같은 엄청난 굉음이 베수비오 산에 울려 퍼졌다. 산꼭대기 전체가 터져 날아간 베수비오 산은 검은 구름을 토하며 불을 뿜어냈다. 이내 어두운 하늘에서 바위와 재의 폭풍이 덮쳤으며, 부글부글 끓는 용암의 파도가 화산 옆구리를 타고 계곡으로 흘러내렸다.
맨 처음 재앙을 입은 곳은 해변 휴양지 헤르쿨라네움이었다. 흙탕물, 흙, 용암의 급류가 주택을 휩쓸고 인간과 짐승의 숨통을 막았으며, 결국 20미터 두께로 도시를 덮어 그대로 암석으로 굳어 버렸다. 이때 화산의 남동쪽 측면에 있던 폼페이의 시민 10만여명은 운이 더 좋은 듯 보였다. 화산재만 이슬비처럼 계속 내리고, 이글거리는 용암은 다른 방향으로 흘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도시의 포장된 거리에 있던 사람들은 그들의 집과 가게, 신전, 공중목욕탕으로 몸을 피했지만, 어디로 숨었든 죽음의 함정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슬비 같던 화산재는 이내 작은 화산암 덩어리로 변했고, 물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더 큰 바위들도 섞여 내렸다. 유황 냄새가 온 도시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숨 쉬는 모든 것을 질식시켰다.
이틀 뒤 연기와 먼지구름이 걷히고 나폴리 만 위에 태양이 밝게 빛났지만, 폼페이는 사라지고 없었다. 부유했던 지방 도시는 이제 회색의 화산 물질 더미에 덮여 버렸다. 도시는 그전에는 화산 피해를 보았다가 어렵게 복구한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 매몰된 주민들은 곧 잡초에 묻혀 잊히고 말았다.
보물 사냥꾼들이 문명을 발견하다
시간이 흘렀다. 15세기도 더 지나서, 장식용 이나 전시용으로 보물을 찾는 사람들이 매몰된 도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헤르쿨라네움이 있던 자리에서 조각상이 몇 개 발견되었지만, 그 자리를 덮고 있는 암석층을 뚫고 들어가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폼페이에서는 일이 더 수월했다. 덮개가 화산재와 작은 화산암 덩어리들과 부석들로 이루어져 좀 더 약했던 것이다.
1748년 왕의 허가를 얻은 고고학적 발굴이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발굴자들은 놀라우리만큼 잘 보존된 폼페이인의 저택과 마주쳤는데, 벽들이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들이 믿는 신을 표현한 대리석과 청동 조각상들이 발굴되었고, 농산물과 포도주를 팔던 시장 건물이 드러났다.
가장 가슴 아픈 발견물은 대폭발과 유독한 유황 구름 때문에 갑자기 생명이 멈춘 사람들이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갑작스러운 죽음에 놀라 장례 음식을 마련하기 위해 모여 있었다. 가장 귀중한 재산들을 챙겨 달아났다가 곳곳에 잠복해 있던 유독 물질에 희생당한 사람들도 있었다.
당국이 오랫동안 공개하지 않은 다른 발견물들은 향락적인 생활 방식을 반영한 것들이었다. 남자 성기의 형태로 만든 한표지 물은 창가를 가리키고 있다. 파우나 저택의 모자이크는 사티로스가 벌거벗은 님프와 사랑의 유희를 벌이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발견물 중에는 붉은색을 칠한 힘차게 발기한 남근을 묘사한 조각품도 있었는데, 높이가 49미터가 넘는다. 그와 같은 성애 미술은 바쿠스 숭배에서 중요한 부분이었음이 분명하며, 학자들은 집 외벽에 남자 성기를 그리는 것은 액운을 막기 위한 방편이라고 주장한다.
그 뒤 250년 동안 갈수록 더 체계적인 발굴이 이루어져, 폼페이는 베수비오 산의 잿더미 속에서 불사조처럼 다시 일어나 예수시대 무렵의 도시 생활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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