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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왕의 자부심, 베르사유 궁전 & 라스코의 석기 시대 동굴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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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얼굴, 에펠탑

-파리 시를 굽어보는 19세기의 가장 중요한 건축물
THE EIFFEL TOWER: THE BEST-KNOWN FACE of PARIS

출처:픽사베이

루이 13세는 황무지나 다름없던 베르사유에 사냥 별장을 지었다. 이 별장 은 물에 둘러싸인 세 날개 구조의 단순한 벽돌 건물이었다. 이 샤토에 유년의 즐거운 추억이 많았던 아들 루이 14세는 정부 드라 발리에르와 밀회를 즐길 장소로 당연히 이곳을 택했다. 샤토 외부는 그를 위해 온갖 양식의 장식물로 꾸며졌으며, 그는 인테리어를 현대화하고 따로 날개 건물을 하나 덧붙였다.
 1668년 루이 14세가 이 샤토를 자기 궁 전으로 만들고 파리의 조정을 이곳으로 옮기기로 하면서, 알현식과 연회, 성대한 국가행사를 거행하려면 훨씬 큰 공간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루이 르 보가 새 왕궁을 그런 목적에 더 적합한 규모로 확장하는 일을 맡았다. 10년 뒤에는 건축가 쥘 아르두앵 망사르가 호화로운 외부 유리창들로 건물을 장식했다. 이즈음 태양왕을 자임하던 루이 14세를 한층 빛나게 하자는 뜻이었다.

강박 관념의 승리
이 궁전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왕의 자부심을 나타낼 증거로, 수 세기가 지나도 남아 있을 규모와 의장과 아름다움'을 지녀야 했으며, 그 목표는 확실히 달성되었다. 베르사유 궁전은 실제로 루이 14세의 위엄을 과시하는 놀랄 만한 증거였다. 1682년 베르사유에서 그의 신하는 2만 명을 헤아렸고, 궁 안에 사는 사람만도 5000명이 넘었다. 궁에는 1252개의 벽난로에 불을 때서 난방하는 1300개의 방이 있었다. 마구간들은 말 2500마리와 마차 200대를 수용할 수 있었다. 태양왕의 권력은 이 궁전뿐만 아니라,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도 이 프로젝트에 갈수록 더 많은 재원을 쏟아부을 수 있었던 그의 능력에서도 드러났다. 더 이상 사치하는데 반대하는 재무대신 같은 유력자들은 불신임받았다. 자연의 장애물조차 그의 강박적 인 집착을 방해할 수 없었다.
 루이드 생 시몽 공작은 베르사유를 이렇게 묘사했다.
 "음울하고 무미건조한 곳. 풍광도 숲도 물도 없고, 이곳 바닥은 유사(流)와 늪으로 이루어져 굳건한 지반조차 없으며, 내부 에는 심각할 정도로 신선한 공기가 결여되어 있다."
 왕은 그런 비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무시해 버리고 병사들을 시켜 늪을 메우고 큰 나무들을 심게 했으며, 우물들과 분수들에 물을 대기 위해 수천 미터에 이르는 도랑을 파게 했다.

완벽한 예술 작품
완성된 이 예술 작품을 두고 정원 역사가 빌 프리트 한스만은 이렇게 논평했다.
 "서양 건축과 정원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놀랄 만한 구조물이다."
 궁전 주위의 녹지대를 루이 14세가 얼마나 중히 여겼는지는 정원 설계사 앙드레 르노트르에게 내린 지침에 잘 드러나 있다. 왕의 정원을 '세상 사람들이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런 곳'으로 만들라고 한 것이다. 그 뒤로 궁전 주위의 뜰을 확장하는 일이 건설 작업의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 
 망사르가 대리석과 금과 은(태평양은 은 좌에 앉아 각지에서 온 사절을 접견했다)으로 궁전 내부를 장식하고 '거울의 방'을 만들어 화려함을 배가시키는 동안, 르 노트르는 산책로, 가로수길, 분수, 실개천, 연못, 조각품, 오렌지 온실 등으로 정원을 꾸몄다. 
베르사유 건축의 절정은 대 트리아농과 소 트리아농으로 알려진 별궁들이었다.
소 트리아농을 선사 받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를 일러 '베르사유의 가장 기쁜 소식' 이라고 했다.

 

 

라스코의 석기 시대 동굴 벽화

동굴 벽에 살아 숨 쉬는 태고의 동물들
(STONE AGE PAINTINGS in THE CAVES of LASCAUX)

출러:doopedia

 

1940년 프랑스의 도르도뉴 현에서, 17세기 소년 마르셀 라비다와 세 친구는 그야말로 우연히 놀라운 발견을 했다. 그들은 죽은 당나귀를 묻을 자리를 찾다가 한 농가 아낙에게서 넘어진 가문비나무 아래 이상한 구멍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 구멍은 땅속으로 꽤 깊이 뚫려 있는 듯했으며, 그래서 소년들은 성냥과 기름등을 준비 하고 로보라는 테리어 개를 데리고 보물을 찾기 위해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구멍을 발견한 곳은 베제르 강 근처였으며, 개가 구멍으로 뛰어들자 소년들도 뒤를 따랐다. 그때, 발아래 땅이 꺼져서 그들을 삼켜 버렸다. 구멍 바닥에서 정신을 차린 친구들은 마 르셀의 손에 들린 성냥 불빛을 보았고, 자기 쪽으로 오라는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어두운 동굴 벽을 더듬어 더 깊이 들어가 다가 마침내 높이 약 5미터에 이르는 빈 굴 에 도달했다. 기름등의 흔들리는 불빛 속에 정말 놀라운 광경이 드러났다. 동굴 벽에 붉은 말 한 마리가 두 황소의 뿔 사이에 그려져 있는 것이었다. 이 굴은 그 뒤 '황소의 방'으로 알려졌다.

인형 같은 인물
프랑스의 뛰어난 동굴 벽화 전문가 앙리 브 뢰이 대수도원장은 소년들의 학교 선생에게서 연락을 받고 현장을 둘러보았다. 그는 즉시 이것이 엄청난 발견이라는 사실을 알아 차렸다. 소년들이 발견한 곳은 적어도 그때 까지는 구석기 예술의 최대 소장처였다. 처음 소년들이 발견한 작은 굴에서부터 한 쌍의 터널이 돔 모양의 천장이 있는 더 넓은 구역들로 이어졌다. 전체 길이 140미터에 이르는 동굴의 벽들에는 겹친 동물 형상 등 화려하게 채색된 그림들이 아주 많았다. 수도원장이 조사한 것은 질주하는 말들과 가지 뿔이 세밀하게 묘사된 사슴들 15미터짜리 황소들, 들 염소, 들소 등이었는데, 대부분은 황토색이나 붉은색, 검은색으로 그린 것이었다. 이 많은 동물 초상들 가운데 인간의 것은 단 하나인데, 그나마 아이가 그린 그림 같다. 아이의 인형처럼 그 인물은 팔을 벌리고 바닥에 누워 있는 모습이다. 아래쪽에는 새 한 마리가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고 위쪽에는 들소와 달리는 코뿔소가 역시 같은 유형의 정물화로 그려져 있다. 이는 사냥 장면을 묘사한 것일까?
 앙리 브뢰이 수도원장은 그 그림들을 1만8000년 전에 그린 것으로 추정했다. 이는 대단히 정확한 추측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현대의 연구자들은 제작 연대를 1만 5000년 전쯤으로 보고 있다. 그 당시 오늘날의 독일 땅은 대부분 얼음에 덮여 있었고, 프랑스 남부는 나무가 드문 사바나였다. 말 들소, 순록, 피부가 두꺼운 코뿔소가 넓은 초원을 거닐었고, 석기 시대 사냥꾼들은 끝에 뾰족하게 간 돌을 단 창으로 그 동물들을 죽이는 법을 알고 있었다. 동굴 벽화를 왜 그랬는지는 아직 논란이 분분한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이들 원시 시대의 미켈란젤로들은 많은 사람들이 짐작하듯이 사냥할 때의 무용을 묘사하고자 한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당시 주된 사냥감이던 순록 그림 이 극히 적은 까닭은 무엇인가? 어쩌면 그 그림들은 우리가 전혀 모르는 비의적인 목적으로 그린 것이고 동굴은 제사 의식에 사용되었을지도 모른다.
 라스코 동굴 벽화가 발견된 뒤 다른 지역들, 특히 베제르 강 유역과 도르도뉴 전지역, 페르고르 지방, 라인 강 연안, 피레네 산맥 기슭, 칸타브리아 산맥 등지에서 동굴 벽화들이 발견되었다. 가장 최근에 발견된 것은 마르세유 근처 해안에서였는데, 그 동굴은 36미터 물아래 있었다. 이미 1879년에 스페인 알타미라에서 동굴 벽화가 발견되었지만, 오랫동안 의혹에 시달렸다. 선사 시대 사람들에게 그와 같은 독창성이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퇴색의 위험
라스코 동굴이 발견된 사실은 몇 년 동안 공표되지 않았다. 그 바로 전에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되었기 때문이다. 8년 뒤 발견 사실이 알려지자 동굴을 보기 위해 수백 명씩 몰려왔다. 그 뒤 동굴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도로가 뚫리고, 방문객들이 내뿜는 입김으로부터 그림을 보호하기 위해 밀봉한 문과 온도 조절 장치가 설치되었다. 하지만 갖은 노력을 했는데도 그림의 색깔은 퇴색 하기 시작했다. 까마득한 세월을 견뎌 낸 그림이 급속히 망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현재 한 해 3만 5000명에 이르는 방문객이 동굴의 모형에 만족해야 한다. 원본은 이제 대중에게 공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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