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돌로 하는 설교', 가우디의 성가족 성당 & 16세기의 다목적 건물 엘 에스코리알

본문

반응형

'돌로 하는 설교', 가우디의 성가족 성당

-위대한 스페인 건축가가 바르셀로나에 바친 필생의 역작
(GAUDI'S SERMON in STONE)

출처:픽사베이

가우디는 성당을 지으면서 '돌로 하는설교' 요 신앙 고백이라고 했지만, 이 성당은 우선 그가 만든 가장 위대한 창작품이다.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는 생애 중 40년 이상을 '20세기에 걸맞은 성당'을 짓는 꿈에 바쳤다. 1926년 일흔넷 조금 못 미쳐 세상을 떠났을 때, 그가 남긴 것은 거대한 건축 현장이었다. 그때까지 완성된 것은 성당의 북쪽 파사드와 계획되었던 뾰족탑 18개 가운데 하나뿐이었다. 성가족(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지금도 미완성이며, 연장과 기중기들이 공사장을 시끄럽게 울리고 있다. 그런데도 이 건물은 이미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종교 건축의 하나요 바르셀로나 의 표상이며, 경제적인 대가를 무시해 버린 개인주의 예술의 정수다.
 이 뛰어난 건축가는 마지막 수년 동안 후원자들이 내는 기금이 줄어드는 것을 걱정하며 공사 현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지금까지 이 교회는 건설비를 전적으로 기부금으로 충당하고 있다. 격동의 1920년대에는 종교 건물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졌고, 엄격한 기능주의가 득세해 가우디의 건축 양식은 한물간 것처럼 생각되었다. 가우디가 죽고 10년이 지난 1936년에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자, 성당 공사는 중지되었다. 이후 이 유명한 카탈루냐의 아들은 인민의 적으로 낙인찍혔으며, 무정부주의자들은 그의 유골이 안치된 지하 묘에 불을 놓고 그의 작업실을 약탈했다. 그의 스케치, 설계도, 모형 가운데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공사는 1952년에야 다시 시작되었다. 남아 있는 소수의 스케치를 이용해서 평면도를 결정하고, 그 이상은 최대한 가우디의 상상에 가깝게 지으려고 노력했다. 그런 방식은 가우디의 철학과 전적으로 일치했다. 그는 생전에 전체적인 계획은 가지고 일한 적이 없었다. 콘셉트는 공사가 진척됨에 따라 발전했다. 완공된 건물이 어떤 모습일지에 대해 그는 단지 시적인 말로 묘사할 수 있었을 뿐이다. 
 "내 모델은 나무다. 나무에는 가지가 있고, 가지에는 잎이 달린다. 그리고 모든 부분이 조화롭게 자란다... 이 나무는 외부의 지원이 필요 없다. 저절로,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룬다. 모든 것이 균형을 이룬다."

모더니즘의 거장
 모더니즘으로 알려진 양식이 '뿌리로의 회귀' 또는 자연 형태로의 회귀를 찬미했다. 이 양식은 독일의 유겐트스틸, 프랑스의 아르누보, 영어권의 모던스타일과 비슷한 목표를 추구했다. 모더니즘은 카탈 루냐에 뿌리를 내렸다. 바르셀로나의 콰드 라트에만도 저마다 다른 건축가들이 지은 모더니즘 양식의 집이 27채나 된다. 그중 셋 은 당연히 이 양식의 가장 중요한 해석자요 건축가요 설계자인 가우디가 지은 것이다. 상징적인 장식과 표현이 풍부한 건축 양식으로, 특유의 개성을 발전시킨 작품들이다. 
 가우디에게는, 인간이 자연의 일부고 집은 거처여야 한다. 공간은 단순한 정육면체가 아니고, 각이나 날카로운 모서리 없이 물이 흐르는 듯한 곡선으로 이루어져야 한 다. 그는 특히 전통적인 재료를 좋아했으며, 그것들에 다양한 색깔로 페인트를 칠했다. 성가족 성당 역시 전체를 페인트로 칠하게 되어 있었다. 동쪽 파사드는 '인간의 구속 '이 주제이므로 밝고 친화적이어야 하고, 서쪽 파사드는 순교를 나타내므로 색조가 어두워야 했다. 18개의 뾰족탑 가운데 16개는 제자들과 복음서 저자들의 몫이고, 다른 둘은 성모와 성자의 몫이다. 이런 상징주의도 가우디가 현대 기술을 사용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가우디의 집들은 당연히 엘리베이터, 지하 차고, 떼어 낼 수 있는 벽 등을 갖추었다. 그는 냉방 시설, 특별한 문손잡이, 난방 장치, 조명, 계단 발코니를 실험 했다.
 성가족 성당은 현재 큰 공사를 하느라 매우 부산한 것이 중세 시대 교회들의 건축 방식을 닮았다. 18개의 뾰족탑은 하늘을 찌를 듯하고, 북쪽 문에는 조각가 수비라치의 조각이 설치되었다. 가우디의 꿈은 점차 이루어지고 있지만, 완공이 가까워지면서 우려도 나타난다. 사실. 가우디의 꿈속에 있던 원대한 계획이 다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 아닌가.

 

 

16세기의 다목적 건물 엘 에스코리알

-궁전과 수도원, 영묘를 겸한 기념비적인 건물
(PLACE,MONASTERY,AND MAUSOLEUM)

출처:픽사베이

 

에스코리알로 알려진 기념비적인 엘건물의 정식 명칭은 '산 로렌소 데엘 에스코리알 왕실 수도원'이다. 이는 허영에 찬 권력 과시도 아니고, 자기애적인 통치자의 꿈과 환상을 반영한 것도 아니다. 엘 에스코리알에서는 숭고함이 지상의 가치였다. 사람의 손길을 타지 않은 자연에 둘러싸인 남북 207미터, 동서 162미터의 평행사변형 부지에는 서쪽 파사드이자 주 파사드, 16개의 안뜰, 15개의 십자 통로, 88개의 분수가 있다. 거주자들은 2000개의 창에서 내려다볼 수는 있었지만, 누구도 안을 들여다볼 수는 없었다.
 건립기에는 국왕 펠리페 2세가 성 라우 렌티우스를 기려 수도원을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557년 프랑스와의 중요한 전투에서 이긴 날이 이 성인의 생일이어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이 건물을 지은 또 다른 이유는 좀 더 인간적이다. 카를 5세가 자신과 자신의 일가가 묻힐 교회를 지으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것이다.
 펠리페 2세는 기쁜 마음으로 이 소원을 받들었지만, 당대 최고의 권력자로서 자신이 지닌 왕으로서의 권력과 종교상의 권위도 기념하고 싶었다.
 왕은 종교적인 열성으로 지질학자. 현자, 철학자들에게 자문한 뒤 친히 적합한 곳을 물색했다. 마침내 새 도읍 마드리드에서 하루거리에 있는 마음에 드는 자리를 찾았다. 과다라마 산맥에 있는 고원이었다. 근처 마을의 매력 없는 이름 '엘 에스코리알(달팽이 언덕)'이 1055미터 고지의 그 건물에도 붙여졌다. 근처에는 폐광이 하나 있었다. 이 지점에서 꼭대기까지는 지반이 튼튼하고, 주위 봉우리들이 현장을 위협하듯 굽어보고 있다. 먼 거리에서도 펠리페 2세가 나랏일을 돌보던 수도를 볼 수 있다. 사람을 싫어해서 좀체 여행을 하거나 조언을 구하지 않는 이 염세적인 왕은 '5센티미터 문서'에 적힌 법령에 따라 세상을 통치했다.
 그는 공사를 몸소 주관하며 나폴리 건축가 후안 바우티스타 데 톨레도를 고용했는데, 톨레도는 공사가 시작된 지 4년 뒤인 1567년에 세상을 떠났다. 결국 그의 보조자였던 후안 데 에레라가 뒤를 이어 21년 만에 그 거대한 건물을 완성했다. 이 다목적 구조물은 수도원, 왕궁, 신학교를 겸했다. 펠리페는 '펠리페 2세 의자'라고 불리는 지점에서 공사의 진척 상황을 점검했다. 이곳은 지금도 엘 에스코리알이 가장 잘 보이는 자리다.

르네상스와 바로크 사이
가까이서 보면, 이 건물은 화강암 같은 커다란 돌덩이에서 완벽하게 잘라 낸 차가운 회색 블록을 빈틈없이 쌓아서 지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깔끔하게 처리된 윤곽은 르네상스 양식의 특징이지만, 당시 유럽이 이미 바로크 시대로 접어든 만큼 여기서도 그 증거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장식이 풍부한 일반적인 바로크 양식이 아니라 '데 소르나멘타도' 곧 장식이나 경쾌한 형태들 이 없는 바로크 양식이었다.
 건축가는 의식적으로 모든 형태의 장식을 피했다. 이런 종류의 바로크 양식은 훗날 엘 에스코리알에서 이름을 따 에스코리알 양식(estilo scoralense)이라고 불린다. 여기에는 어떤 허식도 드러내서는 안 되었다. 이를 '돌로 된 야만'이라며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목적에 충실한 면을 찬미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쨌든 이러한 점은 설립자의 성격을 정확히 반영한다. 그만큼 엄격하고 비 사교적이며, 전제적이고 신실한 사람이었다. 엘 에스코리알의 가장 중요한 본보기가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이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펠리페는 자신을 무엇보다도 신의 종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겸손한 종은 아니었다.
 "짐. 왕이 선포하노라. 하느님 가까이에 살라. 짐이 왕명을 선포하노니 이는 신의 명령이다."
스페인 대제국을 통치하던 지배자가 은퇴해서 지내다 임종을 맞은 엘 에스코리알 의 날개 건물은 극단적으로 엄격한 단순성을 보여 준다. 높은 제단을 바라보는 창을 갖춘 타일을 두른 서재 겸 침실을 보라.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