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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낭만주의자의 기념비, 노이슈반스타인성 & 포르투갈의 꿈, 바탈랴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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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낭만주의자의 기념비, 노이슈반스타인성

-바그너 오페라의 배경처럼 아름다운 꿈의 성
(SCHLOSS NEUSCHWANSTEIN - MONUMENT to A ROMANTIC)

출처:픽사베이

 

바그너의 오페라 에는 같은 낭만주의자이자 친구인 루트비히 2세 왕이 지은 노이슈반스타인성을 위한 사랑의 송가가 담겨 있다.
 "꿈에서 본 대로/ 내 의지대로 / 만인이 볼 수 있도록 아름답게 서 있네/ 경이로운 성."
 리하르트 바그너와 루트비히 왕의 고귀 한, 거의 신비하기까지 한 우정을 노이슈반스타인 성에서보다 더 실감 나게 느낄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알가우 산지의 봉우리에 올라앉은 이 성은 동화속 성을 독일 땅에 옮겨 놓은 듯한 모습이다.
 우리는 이 성을 즐기면서 왕과 작곡가가 서로의 속마음을 알아주는 지기지우였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바그너의 오페라 를 위한 무대와 튀링겐 숲속 바르트부르크 성의 추억에서 많은 영감을 얻어 지은 것이 이 판타지 성이기 때문이다.

루트비히의 유산: 성들과 빚
이 '제2의 바르트부르크 성'은 건축가 에두 아르트 리델, 게오르크 돌만, 율리우스 호프 만이 1859년에서 1892년 사이에 건설했다. 루트비히는 1884년 5월에야 자신이 꿈꾸던 성에서 살게 되었지만, 환상에서 깨어난 왕 은 1885년 6월 2일 슈타른베르크 호수 곁의 베르크 성으로 이사했다. 그러나 바로 그다음 날 그곳에서 바그너의 비극적인 오페라에 나 어울릴 듯한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예술을 사랑한 왕은 유산으로 웅장하고 화려한 수많은 성들과 시골 저택들, 무수한 걸작들, 그리고 금화 1400만 마르크의 빚을 남겼다. 왕이 독일 재상 비스마르크에게서 해마다 봉급으로 받는 30만 마르크는 그의 호사스러운 생활을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하지만 오늘날 루트비히의 아름다운 유산들은 많은 돈을 들여 바이에른을 찾는 수백만 명의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으니. 그 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들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관광 명소는 물론 노이 슈반슈타인이다.

신들이 복수하리라
성의 주요부는 1층에 집무실과 개인 공간을 갖춘 4층짜리 궁전이다. 이 호화로운 방들에는 60미터에 달하는 주 탑을 통해야 들어갈 수 있다. 중세 기사들이 등장하는 장면을 묘사한(성의 거의 모든 그림이 그렇지만) 뛰어난 벽화들은 어디서부터 보아야 할지 판단 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또한 무도 홀의 낭만주의는 거의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곳은 성 전체에서 가장 인상적인 공간이며, 그 아름다움에서 원본이라고 할 수 있는 무도 홀을 능가한다. 노래의 향연이 열리던, 바그너가 오페라 의 영감을 얻었다는 튀링 겐의 성 바르트부르크의 무도 홀 말이다. 
 왕은 작곡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홀의 설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성스럽고 범접할 수 없는 이곳은 당신이 본 가장 아름다운 홀 가운데 하나일 것이오. 당신은 또한 여기서 와 을 생각나게 하는 것들을 발견할 테고, 이 홀은 모든 면에서 어머님이 해마다 산문을 통해 망쳐 놓는 호엔슈반가우성보다 더 아름답소, 모욕당한 신들은 앙갚음을 할 것이고, 우리와 함께 희박한 대기 속에 높이 자리할 것이오."
 왕은 단 한 부분만은 바그너식 본을 따르지 않았으니, 바로 공식 알현실의 설계였다. 커다란 비잔틴 황관에 초점을 맞춘 비잔틴 양식의 이 방에는 139개의 계단이 한 문으로 통하는데, 여기에는 금과 상아로 만든 왕좌를 놓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왕이 의문의 죽임을 당하는 바람에 그 계획은 이루어 지지 못했다.

 

 

포르투갈의 꿈, 바탈랴 수도원

-마누엘 양식으로 지은 중세 미술의 기념비
(A PORTUGUESE DREAM)

출처:픽사베이

 

 

15세기에 항해 왕자 엔리케의 지도아래 포르투갈이 장악했던 힘은 옛 영광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가 바탈랴 수도원에 세운 예배당은 돌 하나까지 고스란히 남아, 중세 수도원 건축에서 가장 위대한 작품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전쟁 기념비 
'바탈랴'는 포르투갈어로 '전투'를 뜻하며, 그것은 수도원을 건설하는 원인이 된 전투였다. 바로 가까이에 알주바호타 전쟁터가 있는데, 1385년 포르투갈은 거기서 항해 왕자 엔티케의 아버지인 주앙 1세의 지도로 카스티야 왕 후안에게서 독립을 이룩했다. 주앙 1세는 승리에 감사하다 뜻에서 산타마리아 다 비토리카 수도원을 지었다. 바탈랴시 한가운데 있는 이 건물은 성모마리아의 가호에 감사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규모부터가 가로 178미터, 높이 137미터로 웅대하다. 이곳은 주앙 1세가 창시한 아비스 왕조를 위한 인상적인 예배 장소이기도 했다. 수도원 건물의 양식은 성기 고딕 양식부터 마누엘 양식에 이르며, 르네상스 양식도 있다. 여섯 명의 탁월한 건축가와 제자들이 여섯 명의 각기 다른 왕이 주문한 건물을 짓는 데 관여했다. 1388년 주앙 1세는 도미니크회 수도사들에게 수도원 건축을 시작하라고 지시했으며, 그들이 고용한 포르투갈 건축가 아폰수 도밍게스는 1402년까지 일했다. 도밍게스는 이 당당한 건물에서 더 큰 부분을 지었다. 거기에는 신랑,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는 성가대석, 장식이 풍부한 정문, '왕의 회랑'으로 알려진 웅장한 십자형 회랑 톨로도 포함된다. 

포르투갈 고딕
또 다른 고딕 건물은 프랑스 교회 건축가 우게트의 작품이다. 1430년에 그가 건축한 웅장하고 화려한 '설립자의 예배당'은 포르투갈 고딕 양식에서 특히 걸작이다. 이 건물은 이전 시기 포르투갈 로마네스크 건축이 그랬던 것처럼, 정통 고딕에서 벗어나 있다. 

마누엘 양식
포르투갈에서 예술에 대한 개인주의적인 태도는 마누엘 1세(1469~1521년)가 다스리던 시기에 절정에 달했다. 그는 포르투갈 사람들 사이에서 '행운 왕'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씀씀이가 헤픈 이 군주는 포르투갈의 항해가, 탐험가, 과학자 들이 미지의 세계를 활짝 연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그들이 그 땅에서 가지고 온 것들에 넋이 빠져서는 왕국의 새로운 재물을 돌 속에 보관할 수 있도록 더욱 많은 건축물을 지을 것을 선포했다. 당대의 표준 양식에 갇히기를 싫어한 그의 건축가들은 고딕에서 벗어나 토속적인 요소들을 포함한 독특한 형식들을 내세웠다. 이들 '포르투갈 야만인들'은 이렇게 해서 특유의 양식을 창안했으며, 원기 왕성한 왕의 이름을 따서 이 양식을 마누엘 양식이라고 한다.
 바탈랴 수도원도 이 양식을 택했다. 고딕수랑은 마누엘 양식에 따라 과장된 규모의 섬세한 세공품들로 장식했고, 기둥들은 날씬했다. 궁륭 아치들은 돌이 아니라 꽃 인 것처럼 열리고 닫혀서, 나무 아래처럼 얼룩진 햇빛이 들게 했다. 마누엘 양식은 '왕의 회랑'을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회랑의 하나로 만들어 놓았다. 많은 전문가들이 서 북쪽 귀퉁이에 있는 분수들을 '중세 석공 술의 진주'라고 부른다. 그리고 '미완의 예배당'으로 통하는 15미터 높이의 문은 마누엘 양식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애석하게도 마누엘 1세는 바탈랴에 대한 관심이 사라져 벨렘 수도원같이 자신이 세운 건물들을 편애했지만, 후임자들은 스페인군을 물리친 포르투갈의 위대한 승리자가 지은 바탈랴 수도원에 다시 관심을 돌렸다. 그 수도원은 세월의 풍상을 견뎌 내고, 마누 엘 양식에 의해 개선된 고딕 걸작품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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